삼한지에서 배우는 7가지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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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8. 20:27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생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사람들이 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없어지는 것을 막고 그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영광의 보상을 소실시키지 않기 위해 인간사에 대한 최초의 탐구서인 ‘역사’를 쓴다고 말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그 전쟁의 책임이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전할 목적으로 ‘역사’를 썼다.

키케로는 “역사는 생의 스승이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만일 태어나기 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어린이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만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동물의 생존방식이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동물에게는 역사를 ‘생의 스승’로 삼을 수 있는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독서 관련기관 그리고 인터넷 포탈에서 지식검색을 하면 ‘삼국지’가 늘 청소년 필독 도서로 꼽힌다. ‘삼국지’는 중국의 위, 촉, 오 세나라 약 80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바탕에 두었지만 그 위세는 몇 세기를 뛰어넘고 있다. 우리 역사도 아닌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서 왜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의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 자체에 대한 앎의 무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 이외에 우리역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의 고구려, 발해역사에 대한 왜곡사건이나 일본의 끊임없는 독도망언 그리고 최근 ‘독도는 일본땅 이다’라고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논객까지 있는 것을 보면 선조들께 한참 면목이 없다. 특히 키케로가 언급한 국가와 개인의 삶에서 우리 역사를 알고 얼마만큼 스승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평가에서는 많은 반성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글로벌을 지향하고 중후장대한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삼한은 대한민국의 역사

역사란 부르크하르트의 말대로,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며, 그 기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 또한 E.H. 카아는 ‘역사는 역사가의 역사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역사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사인 주체인 동시에 역사가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이 없거나 문제를 덮어놓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과거는 역사책에서 생략되며, 그래서 역사로서 기억되지 못한다.

‘삼한지’의 저자인 소설가 김정산은 어느 역사가 보다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안목이 깊다. 그는 월탄이 번역한 ‘삼국지’를 밤새 읽으면서 한때 제갈공명의 명석함과 신비로움이 삶의 지표가 되었고, 그래서 중국이란 나라가 대단하고 부럽게 생각됐다. 그에 비해 우리의 영웅들은 너무 초라하고 빈약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삼국지와 중국인에 대한 부러움은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중국의 인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삼국의 인물들을 재평가 하고 다시 현세로 불러내어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 특히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청소년들에게 원대한 꿈과 포부 그리고 선조의 삶과 지혜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중국의 삼국지에 견줄 만한 우리나라 삼국지를 써보기로 결심한 이후 집필에만 6년, 사료수집과 구상단계까지 포함하면 꼬박 10년의 세월을 ‘삼한지’를 위해 바쳤다. 그의 ‘삼한지’가 없었다면 삼한의 역사는 부르크하르트의 말대로 관심 없이 먼지 덮인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삼한지’는 삼국시대의 모든 시대를 다루지는 않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인 서기 580년부터 신라가 나당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을 완성하는 676년까지 약 1백년간의 격동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가장 많은 영웅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삼국 통일 전의 약 100년의 시간이 절정이라고 한다. 중국 대륙을 위협하며 요동 지역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군림했던 고구려의 호방하고 활달한 기상을 잘 살려냈고,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침범과 내란 등으로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놓여 있던 신라가 삼한 통일의 숙원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또한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미미했던 백제의 영광을 훌륭하게 되살려냄으로써 동아시아의 군사대국이자 문화강국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던 백제의 성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삼한지에서 배우는 리더십

‘삼한지’는 삼국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던 배경이라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영웅과 인물이 등장한다. 이 책의 큰 의미 중 하나는 역사 속에서 존재하던 우리 영웅들의 모습들을 재현함으로써 그들의 위대한 기상과 활약상들을 흥미진진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영웅들의 이야기라는 부분에서 조망할 수 도 있지만 경영의 바이블이라고 칭할 만큼 현 시대의 기업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과 문제 그리고 대안들이 촘촘히 녹아져 있다. 또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리더십이란 관점에서도 조망해 볼 수 있다. 이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의 대표적인 인물을 리더십의 유형으로 분류해 보고자 한다.



을지문덕-전략가형 리더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612년 수나라의 우중문, 우문술이 113만여 명의 수륙양군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수공으로 수나라의 대군을 무찔러 승리하였다. 을지문덕의 지략이 독자 세력권을 유지하려던 고구려와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던 수의 명운을 갈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뛰어나다.

을지문덕은 전쟁에 대비하여 사전에 군사 훈련을 시키고 식량까지 미리 비축해 두었다. 각 성을 공고히 구축하고 성주들에게 전쟁에 대한 목표와 역할을 설정해 주고 전쟁후의 비전도 제시했다. 을지문덕 스스로도 늘 처신을 조심하고 자신을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구려 군은 지리적 조건과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수나라 군을 무력화시켰다. 을지문덕의 유인전과 기습 공격전은 튼튼한 군사 방어체계와 이를 뒤받쳐주는 조직된 군대와 백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가장 빛나는 전략은 적의 보급로와 후군을 끊어 정벌군을 고립시키고, 때를 기다려 적군의 전투력이 가장 약해졌을 때 적을 공격하여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리더십 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명확하게 과업의 포지션을 설정하고 조직의 장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전략가로서 역할에 있다. 전략가로서의 리더 역할은 지금 현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미리 조망하고 그 쪽으로 이끌어 가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과 전술에 앞선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전쟁을 이끌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인텔의 전 CEO인 앤디 그로브가 전략가적 능력이 탁월한 리더이다.



연개소문-권위형 리더

642년 10월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대신들이 자신을 천리장성의 축조자로 내보내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 10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전국의 모든 권력을 쥐어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다보니 누구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을 타거나 내릴 때는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위를 밟고 오르내렸다. 또한 외출할 때면 반드시 의장대를 내보내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고함을 크게 질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피했다.

연개소문은 전형적인 권위형 리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방식만을 최선이라고 주장하며, 구성원들에게 이를 강요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야만 자신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고 조직 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신하들은 이러한 그를 두려워했다. 크라이슬러의 전 CEO인 아이아코카, 트럼프그룹의 도널드 트럼프 회장이 권위적인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무왕-실행형 리더

백제 제30대 왕으로 재위 무렵 백제는 내외의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간의 내분이나 왕실권위의 약화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기간 동안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같은 왕권의 안정은 무왕이 재위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전쟁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백제를 통치한 지도자 중에 특출 났던 5대왕중의 한 인물이 바로 무왕 이다. 그의 즉위와 함께 정국은 바뀌게 된다. 특히 그의 정치적 감각은 고도로 치밀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그는 신라의 공주 선화공주를 맞이하는 대담한 승부수를 띄웠고 보기 좋게 이뤄낸다. 무왕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발빠르게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백제를 재무장시킨다. 역대 백제임금들 중에서 가장 집요하고도 오래 신라를 공격한다. 그는 대규모의 것만 해도 12회에 걸친 신라침공을 계속했다. 무왕의 치세는 외교에서 단연 돋보인다. 고구려의 남진책에 대응하는데 노력했고 수·당과의 외교관계에도 신경 썼으며 왜에 대한 안배에도 신경을 썼다.

리더가 미래 방향을 끌어갈 수 있는 분명한 의지와 함께 실행 계획을 갖고 있지 못하면 조직은 미래에 적극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실행력의 차이가 바로 경쟁력의 차이라는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다. 특히 리더의 강력한 의지 없이 조직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조직 리더들의 실행 역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포춘지의 한 기사에서는 “실패하는 리더의 70%는 치명적인 단 하나의 약점, 즉 실행력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왕은 즉위 초 불안정한 정국을 강력한 군사활동을 통해서 안정화 시키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며 그 동안 숙제로 남았던 대외 환경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리고 다양한 대내외적인 실천과제를 통해 그의 실행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GE의 전 CEO인 잭 웰치, 애플의 스티브 잡스 회장이 실행형 리더에 해당된다.



흑치상지-도전형 리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을 근거로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하여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 군세를 떨쳤다. 그 후 임종성 공략 때 당나라 군사에 참전하여 이를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가 되고, 돌궐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 사람으로 키가 일곱 척이 넘었고 날쌔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 그는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은혜로 대했다. 그가 타던 말이 병사들에게 매질을 당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그 자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사사로운 말로 인하여 관병을 때리겠느냐.”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받은 공로품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긴 재물이 없었다.

리더십 발휘의 원천은 높은 도전정신과 열정에 있다. 열정을 갖추지 못한 리더 밑에 부하들에게 어떻게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할 수 있는가. 리더가 열정과 끈기로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구성원들은 리더를 믿고 따르게 된다. 성공한 CEO의 바탕에는 프런티어와 같은 도전정신과 냉철한 판단력이 전제되어 있다.

21세기 글로벌시대는 유목민시대라고 할 수 있다. 유목민에게는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백제의 부흥운동에서 최선을 다하고 백제의 종말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해주는 새로운 터전인 당나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흑치상지는 고선지와 더불어 한민족 프론티어십의 지평을 넓힌 큰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델컴퓨터의 마이클 델 회장,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이 도전정신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열왕-글로벌형 리더

642년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그의 사위 김품석이 죽자 구원병을 요청하러 고구려로 갔다가 연개소문에 의해 옥에 갇혔으나, 그 후 풀려 나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김유신과 더불어 선덕, 진덕 두 여왕을 모시면서 뛰어난 외교술로 당나라와 일본에 접근하였고, 정치 및 군사를 잘 다스려 훗날의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54년 즉위 후 율령을 제정하고 산업을 장려하는 등 나라 안의 정치에 힘썼으며 국력을 튼튼히 하여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가 확립되었고, 또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그가 멀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이유는 ‘삼국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부 체제 정비를 끝낸 이듬해인 재위 8년 3월 신라는 드디어 백제 정벌에 나섰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건너자 그는 직접 태자 법민, 상대등 김유신 등과 함께 5만군을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갔다. 나당연합군의 단 한번의 공세로 백제는 무너졌고, 김춘추는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개국 이래 700여 년간 계속되던 두 나라의 쟁패가 신라의 승리로 결판이 난 것이다.

국제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그런 사회다. 이러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몰락하고 말 것이다. 특히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하더라도 져서는 안된다. 전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의 처절한 승부다.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논리이다.

오늘날 리더가 직면하는 중요한 측면은 비즈니스가 여러 나라와 국경을 가로지르며 일어나는 글로벌 경영 무대라는 점이다. 글로벌 리더가 처한 상황은 단순히 한 국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경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기민하게 이해하고 대처하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김춘추는 일찍이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의 문물을 배우고 당 태종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신라를 선진적인 국가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글로벌 리더로는 GE의 제프 이멜트 회장, 세계적인 생활용품 회사 P&G의 CEO인 A.G. 래프리를 들 수 있다. 



김유신-서번트형 리더

김유신은 609년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고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과 인박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다. 629년 8월 이찬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7년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그는 삼국을 통일한 뒤 당나라와 싸워서 민족의 영토를 확보하고 동아시아에 번영과 평화를 정착시킨 자주의 큰 인물로 79세의 생애동안 일관한 충성과 지략의 무사도로서 불패의 신화를 남겼다. 수십년 동안 병권을 잡고서도 쿠데타를 일으키지도 거세당하지도 않았다. 정직과 성실로써 적에게까지도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2인자에게는 분명 1인자보다 훨씬 더 자기 분야에 전문적이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그에 걸맞은 원칙을 세우고 사기와 자신감을 북돋워야 한다. 이처럼 2인자는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전방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김유신은 자신의 목표인 삼국통일의 과업에만 철저하게 집중하고 권력욕에 대해서는 스스로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는 서번트 리더로서 구성원들이 삼국통일이라는 공동목표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 정신적·육체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고 도와주는 리더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서번트 리더십은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다른 구성원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은 창의성을 자유롭게 발휘하고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환경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은 사우스웨스트 에어라인의 허브 켈러허 회장을 들 수 있다.



문무왕-외유내강형 리더

태종무열왕의 맏아들로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이 많다. 655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고, 이듬해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668년 다시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당나라의 이적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으나,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은 물론 백제의 옛 땅까지도 자국 영토로 삼으려 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여, 676년 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이때부터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당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망한 백제 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당은 또 문무왕을 계림 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당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원통한 마음이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진군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의 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한반도가 당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김유신, 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조정은 전쟁 또는 평화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만약 이 때 신라 지도부가 비겁한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당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당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한반도를 당에 넘겨준 꼴이 되는 것이었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당과의 결전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신라는 당과 결전을 할 때 당의 심장부에 있는 인질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신라가 전성기의 세계제국인 당을 상대로 한반도를 확보해 갈 수 있었던 데는 엘리트 인물들이 당의 중심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남부 중국 정권 및 왜와 친하게 지냈고, 고구려는 중국 통일정권 수, 당과 싸우기만 했다. 신라는 중국 통일정권인 당의 힘을 이용했다. 당은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삼키려고 했으나 신라에 이용당한 셈이 되었다. 소국이 대국을 이용하려고 하다가 먹히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데 신라는 이 법칙조차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외교를 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수상을 지냈던 로드 팔머스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영원한 동맹국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국익만이 영원하다. 우리는 이 국가이익을 좇아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에는 “영원한 동맹국이 아니라 영원한 국익만 있을 뿐이다”는 팔머스턴의 말을 실천한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신라는 5세기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와 왜의 공세를 저지했다. 5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자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와 대항한 것이 신라였다. 6세기에 접어들어 국력에 자신을 가진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고 7세기 당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정복한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인 짐 콜린스는 단순히 좋은 기업을 탁월한 기업으로 도약시킨 기업들에는 리더십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공통적으로 겸손함과 더불어 강한 신념과 의지를 소유한 외유내강적인 리더가 있다는 것이다. 직원들의 강점을 살리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인재를 키우는 경영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의 연속이었다. 661년에 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문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문무왕은 이와 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고 정치적인 안정에도 신경을 썼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도 적절한 회유정책을 발휘하여 큰 소요 없이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문무왕은 야망을 갖되 자신의 성공이 아닌 국가를 위했고, 겸손함과 실력 그리고 강한 의지로 자신을 철저히 다스리고 타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외유내강형 리더십의 소유자이다. 킴벌리 클라크의 전 CEO인 다윈 스미스, 질레트의 콜먼 모클러 전 CEO가 외유내강적형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


우리는 단군 이래로 5000년간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2000년 전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에 살던 마한, 진한, 변한의 토착민 세력이 있었고 북방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뿌리로 알려진 예맥족과 부여족이 있었다. 신라와 가야 종족은 이들과 또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로 신라 지배층은 흉노족의 한 갈래가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는 게 정설이고, 가야는 인도 계통의 유민 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삼국시대엔 고구려, 백제, 신라 뿐 아니라 이들과 500년간 존속한 가야 6국까지 포함해 한반도에 살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서로 동족이란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로벌을 지향하는 시대에 순수혈통과 단일민족을 주장하고 고수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시대가 변화하고 문명이 바뀌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이념과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며, 그래야 지속적인 국가발전과 민족번영을 기대할 수 있다.


키케로가 역사를 ‘생의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던 근거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전제다. 미국의 에너지기업인 엔론이 대규모 분식회계로 파산한지 4년이 넘었다. 우리나라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대기업, 벤처기업의 회계부정 사건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역사를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삼지 않는 기업풍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곤 한다.


역사가 현재 개인과 기업의 삶에서 살아 숨쉬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역사의식이 희박하다는 증거다. 과거의 역사에서 무엇인가 깨닫고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퇴보하고 있다는 증거다. 역사는 항상 역사정신의 맥을 알고 있는 소수의 영웅에 의해서 흘러왔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진보와 발전의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말했다. 우리 역사에도 항상 위기 때마다 나타나서 민족의 앞길을 연 프론티어의 정신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와 화해하고 올바로 만나는 첫걸음이 바로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삼한지’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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